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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기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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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귄터 기욤은 동독의 스파이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간첩 행위를 한 인물이다. 1944년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1950년 동독 슈타지에 스카우트되어 서독 잠입 훈련을 받았다. 1956년 아내 크리스텔과 함께 서독으로 이주하여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며 브란트의 개인 비서가 되었다. 1974년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고, 이 사건으로 브란트 총리가 사임했다. 기욤은 동독으로 송환되어 영웅 대접을 받았으며, 회고록을 출판하고 199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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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기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72~1974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와 함께 있는 귄터 기욤 (오른쪽)
1972–1974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와 함께 있는 기욤 (오른쪽)
본명귄터 카를 하인츠 기욤
국적동독
출생일1927년 2월 1일
출생지베를린, 바이마르 공화국
사망일1995년 4월 10일
사망지페터스하겐에거스도르프, 독일
안장지파크프리트호프 마르찬 (베를린 소재)
직업정보 요원;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비서
활동 기간1956–1974년
소속 정당나치당 (1944–45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1952년부터)
독일 사회민주당 (1957년부터)
군사 복무
소속나치 독일
동독
군종공군
계급상급대령
복무 기간1944–1945년
1956–1990년
참전제2차 세계 대전
훈장카를 마르크스 훈장
개인사
배우자크리스텔 기욤 (1951년 결혼, 1981년 이혼)
엘케 브뢸 (1990년 결혼)
자녀피에르 붐
범죄
죄목반역죄
형벌징역 13년
사면1981년 10월 1일 사면
주요 사건
알려진 이유서독 정부 침투

2. 초기 생애 및 나치 시대

귄터 카를 하인츠 기욤은 1927년 2월 1일 베를린의 노동자 계급 지역이었던 코리너 슈트라세 31에서 태어났다. 그는 술집과 극장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며 무성 영화의 배경 음악을 연주했던 카를 에른스트 기욤과 미용사 요한나 올드 폴린(Johanna Old Pauline|요한나 올드 폴린de)의 외동 아들이었다. 기욤의 부모는 기욤이 태어나기 4개월 전에 결혼했으며, 둘 다 베를린 출신이었다. 대공황유성 영화의 도입이 겹치면서 기욤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제시하는 극단적인 정책에 카를 기욤을 매료시켰고, 그는 1934년 3월에 나치당에 입당했다. 종전 후 베를린으로 돌아와 사진가로 일했다.

2. 1. 나치당 가입

귄터 기욤은 1944년에 플라크헬퍼로 징집되었다. 같은 해 1월 17일, 나치당에 입당 신청을 했고, 4월 20일에 입당이 승인되었다(당원 번호 9,709,880). 역사가 게츠 알리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기욤은 1944년에 나치당에 입당했다고 한다.[2]

3. 동독 간첩 활동

귄터 기욤은 1950년대부터 동독 국가보안부(슈타지)에서 훈련을 받고 간첩 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 동베를린에서 "인민과 세계"사의 편집원으로 일하던 그는 슈타지에 스카우트되어 서독 잠입을 위한 훈련을 받았다.[6] 1951년에는 같은 슈타지 공작원 교육을 받던 비서 크리스텔 뵘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다.[6] 1952년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에 입당했다.

게오르크 레버의 추천으로 연방 총리실의 경제·재정·사회 정책 담당 비서가 된 기욤은 빌리 브란트 총리의 신임을 얻었다.[8] 1972년에는 브란트의 개인 비서가 되어 서독 총리의 극비 문서와 내부 회의 내용, 사생활까지 알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6]

기욤 사건은 동서독 기본조약에 서명하고 재동독 서독상주대표부를 개설한 직후 발생하여 동독 정부를 당혹스럽게 했다. 동독 정부는 긴장 완화 정책 과정에서 기욤의 활동이 이미 중단됐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지만, 이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26] 동독 중앙정보국 국장을 지낸 마르쿠스 볼프는 브란트의 사임이 예상 밖의 사건이었고, 슈타지 내부에서도 혼란스러웠다고 회고했다.[26]

3. 1. 서독 잠입 및 위장

1956년 동독 국가보안부(슈타지)의 지령을 받은 귄터 기욤은 아내 크리스텔과 함께 서독으로 망명했다.[6] 이들은 동독을 탈출한 망명자로 위장하여 서독 사회에 정착했다.

3. 2. 사회민주당(SPD) 활동

기욤은 1956년 동독 국가보안부의 지령을 받고 서독으로 넘어가, 망명자로 위장하여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했다.[26] 1957년, 그는 공식적으로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한다.[6] 그는 프랑크푸르트 지역의 보수적인 당내 분파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26] 1964년부터 당의 지도원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프랑크푸르트 지역의 당 사무국장이 되었다.[7] 1968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시의회 SPD 의원단의 사무국장이 되었고, 같은 해 시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7] 이듬해 독일 연방 의회 선거에서는 게오르크 레버 연방 교통부 장관의 선거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조직 운영 능력을 인정받았다.[7]

4. 빌리 브란트와의 관계

기욤은 1956년 동독 국가보안부의 지령을 받고 서독에 입국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에서 활동을 시작했다.[26] 사민당 내에서 경력을 쌓은 기욤은 빌리 브란트 총리의 신임을 얻어 그의 최측근이 되었다.

4. 1. 총리실 근무

1970년, 귄터 기욤은 연방총리실 직원이 되었다.[8] 1972년, 빌리 브란트 총리의 당무 비서로 임명되었다.[1] 기욤은 브란트 총리의 당내 일정을 조직하고, 당 기관 및 당원과의 문서 유통을 담당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26] 이 업무를 통해 브란트의 최측근 그룹에 속하게 되었고, 개인적으로 총리와 함께 휴가를 떠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26]

4. 2. 최측근으로의 부상

기욤은 빌리 브란트의 최측근 그룹의 일원이 되었고, 개인적으로 총리와 함께 휴가를 떠날 정도로 가까워졌다.[26]

5. 기욤 사건과 브란트 사임

1970년대 초, 서독 당국은 귄터 기욤이 동독 정부를 위해 간첩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로 인한 스캔들, 즉 기욤 사건으로 인해 빌리 브란트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1] 1975년 12월 15일, 기욤은 반역죄로 13년, 그의 아내 크리스텔은 8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1] 1981년 동구권에 체포된 서방 스파이들과 교환되어 동독으로 돌아갔다.

기욤 사건은 동서독 기본조약에 서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했고, 재동독 서독상주대표부를 개설한 지 5일 만에 브란트가 사임했다. 동독 정부가 긴장 완화 정책 과정에서 기욤의 활동이 이미 중단됐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는데, 이는 충분히 의심스럽다. 동독 중앙정보국 국장을 지낸 마르쿠스 볼프에 따르면, 브란트의 사임은 예상 밖의 사건이었고, 슈타지 내에서도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브란트 사임 이후 동서독 정부 간에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집중적인 비공식 접촉이 있었다. 서독 정부는 동독 정부에게 "상대 지역에서 정보활동을 하지 않으면" 정상화 정책이 진전될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는 한편,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양국 관계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는 경고를 보냈다.[26]

헤르베르트 베너헬무트 슈미트에게 "자네가 지금 해야겠네"라며 총리직을 맡을 것을 요구했다. 슈미트는 총리를 맡으라는 요구에 놀랐으나 의무감에 주저하면서도 수용했다. 1974년 5월 16일, 슈미트는 사민당 후보로 입후보해 총리로 선출되었다. 브란트는 1987년까지 사민당 당대표를 역임했으며, 1994년 유고로 베너와의 담판 내용을 담은 "기욤 사건 기록"[27]을 발간했다.

5. 1. 간첩 혐의 발각

1950년대 동독 중앙정보국이 기욤 부부에게 보낸 암호화된 단파 라디오 메시지가 발각의 단초가 되었다.[20] 1956년 2월 1일 "게오르크"에게, 1956년 10월 6일 "Chr.(크리스텔)"에게 생일 축하 인사를 보냈고, 1957년 4월 중순에는 아들 피에르를 지칭하며 "두 번째 남자를 축하한다"는 내용을 송신했다. 독일 연방정보부는 이 단파방송의 암호를 해독하고 저장해 두었다. 1973년 2월 연방헌법보호청은 기욤 부부를 간첩 용의자로 지목하고 감시를 시작했다.[9]

1973년 5월 29일, 헌법보호청장 귄터 놀라우는 겐셔 내무부 장관에게 기욤이 간첩 용의자라고 최초 보고했고, 겐셔는 이를 브란트 총리에게 알렸다. 놀라우는 기욤을 해고하지 않고 감시하며 정보 누출 범위 파악 및 추가 정보 수집을 요청했고, 브란트는 이를 허가했다. 1973년 7월, 기욤은 브란트 총리의 노르웨이 휴가에 동행하기도 했다.

1974년 3월 1일, 놀라우와 겐셔는 총리에게 수사 결과를 보고하며 2-3주 내에 기욤을 체포할 것이라고 알렸다. 브란트는 이 사건의 파급력을 과소평가했다.[20] 1974년 4월 24일, 기욤과 그의 부인은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기욤은 자신이 동독 국가인민군 장교이자 국가안보부 요원임을 밝히며 장교로서의 명예를 존중해 달라고 말했다.[21] 1975년 중대 외환죄(반란죄)로 기욤은 13년, 그의 부인은 8년을 선고받았으나,[1] 1981년 동서독 간 첩보원 교환으로 동독으로 송환되어 형기를 채우지 않았다.

기욤 사건은 동서독 기본조약 서명 및 서독 상주대표부 개설 직후 발생하여 브란트 총리의 사임으로 이어졌다. 동독은 긴장 완화 정책 과정에서 기욤의 활동이 중단되었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의심스러운 주장이다. 동독 중앙정보국 국장 마르쿠스 볼프는 브란트의 사임이 예상 밖의 사건이었고 슈타지 내부에서도 혼란스러웠다고 회고했다.

5. 2. 체포 및 재판

1974년 4월 24일, 귄터 기욤과 그의 아내 크리스텔 붐은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기욤은 "나는 동독 국가인민군의 장교이며, 국가안보부 요원이다. 나의 장교로서의 명예를 존중해 달라"라고 말했다.[21] 하지만 빌리 브란트와의 면담이 거절된 이후, 기욤은 나머지 사법 절차 과정에서 묵비권을 행사했다.

1975년, 중대 외환죄(반란죄)로 기욤은 13년, 그의 아내는 8년 형을 선고받았다.[1] 그러나 1981년 동서독 간의 첩보원 교환에 따라 기욤은 동독으로 보내지면서 형기를 다 채우지는 않았다.

5. 3. 브란트 총리 사임



기욤 사건은 빌리 브란트 총리의 사임으로 이어졌다. 1974년 5월 1일, 브란트는 내무부장관 겐셔의 개인 비서 클라우스 킹켈로부터 연방범죄청 청장 호르스트 헤롤드의 보고서를 받았다. 이 보고서에는 기욤 조사 과정에서 수집된 브란트의 사생활, 즉 음주와 섹스 스캔들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22] 기욤이 브란트에게 여성들을 공급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브란트 측근들은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 알려질 경우 정치적 스캔들로 번질 수 있음을 우려했다.

1974년 5월 4일 밤, 브란트는 바트 뮌스터아이펠에서 헤르베르트 베너와 1시간여 동안 면담했다. 베너를 포함한 사민당 핵심 지도부는 우울증[23]과 병, 음주 문제[24]로 약해진 브란트가 미디어 공세를 이겨내기 힘들 것이며, 다음 선거에서는 새로운 총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1974년 5월 5일 아침, 브란트는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는 손글씨로 1974년 5월 6일 자 사임서[25]를 작성하여 연방대통령 구스타프 하이네만에게 보냈다. 브란트는 기욤을 즉각 체포하지 않은 과실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다. 브란트의 사임은 1974년 5월 7일 공식 발표되었다.

헬무트 슈미트는 훗날 브란트의 우울증이 사임의 주된 이유였다고 회고했다. 기욤 사건은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직후 발생했으며, 서독의 동독 상주대표부 개설 5일 만에 브란트가 사임하면서 동방정책 추진에 차질이 빚어졌다. 동독은 브란트 사임이 동방정책을 지지하던 동독의 이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동독 중앙정보국 국장을 지낸 마르쿠스 볼프는 브란트의 사임이 예상 밖의 사건이었으며, 슈타지 내부에서도 혼란스러웠다고 증언했다.

브란트 사임 이후, 헬무트 슈미트가 총리직을 승계했다. 베너는 슈미트에게 "자네가 지금 해야겠네"라며 총리직을 맡을 것을 권유했고, 슈미트는 고심 끝에 이를 수락했다. 1974년 5월 16일, 슈미트는 사민당 후보로 총리에 선출되었다. 브란트는 1987년까지 사민당 당대표를 역임했으며, 1994년 유고로 베너와의 담판 내용을 담은 "기욤 사건 기록"[27]을 발간했다.

6. 정치적 영향 및 평가

기욤 사건은 동서독 관계와 서독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은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직후 발생하여 양국 관계에 긴장을 초래했고, 서독 내에서는 반공 여론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서독 내 정보 당국의 감시 체계 강화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6. 1. 동서독 관계에 미친 영향

기욤 사건은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직후 발생하여 양국 관계에 긴장을 초래했다. 동독 정부는 긴장 완화 정책 과정에서 기욤의 활동이 이미 중단됐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지만, 이는 충분히 의심스럽다.[26] 동독이 이런 발표를 한 것은 빌리 브란트 사임이 동방 정책을 지지하던 동독의 이해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동독 중앙정보국 국장을 지낸 마르쿠스 볼프의 설명에 따르면, 브란트의 사임은 예상 밖의 사건이었고, 슈타지 내에서도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브란트 사임 이후 동서독 정부 간에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집중적인 비공식 접촉이 있었다. 서독 정부는 동독 정부에 "상대 지역에서 정보활동을 하지 않으면" 정상화 정책이 진전될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는 한편,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양국 관계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는 경고를 보냈다.[26]

6. 2. 서독 정치에 미친 영향

빌리 브란트의 사임은 서독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특히 반공 여론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브란트의 사임 이후 헬무트 슈미트가 총리직을 승계하였다.[26] 슈미트는 1974년 5월 16일 사민당 후보로 입후보해 총리로 선출되었다.

이 사건은 서독 내 정보 당국의 감시 체계 강화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독 정부는 동독 정부에게 "상대 지역에서 정보활동을 하지 않으면" 정상화 정책이 진전될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는 한편,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양국 관계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는 경고를 보냈다.[26]

7. 기욤의 이후 행적

1981년, 기욤은 동구권에 체포된 서방 스파이들과 교환되어 동독으로 돌아갔다.[1] 그해 초 먼저 동독으로 돌아온 아내 크리스텔과 이혼하고, 2년 후 간호사 엘케 브뢰흘과 재혼했다.

기욤과 동독 정보 책임자 마르쿠스 볼프빌리 브란트의 몰락이 의도된 것이 아니었으며, 이 사건은 슈타지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Die Wende'' 및 독일 재통일 이후, 재통일된 독일은 기욤에게 추가 기소에 대한 법적 면책을 부여했다.

1993년 마르쿠스 볼프의 반역죄 재판에 검찰 측 증인으로 소환되었으나,[4] "4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사건의 세부 사항을 거의 기억할 수 없다"며 자신의 자서전으로 답변을 대신했다.[5]

7. 1. 동독에서의 영웅 대접

동독에서 기욤은 영웅으로 환영받고 칭송받았으며, 스파이 훈련사로 일했다.[3] 공식적으로 "평화의 정찰자"(Kundschafter des Friedens)로서 표창을 받았다.[18] 국가안보부 대령으로 승진했고, 카를 마르크스 훈장을 수여받았다.[18] 포츠담 법학 고등 전문학교(국가보안부 대학교)는 기욤에게 "평화의 보장과 동독 국가의 강화에 대한 각별한 공헌"으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18] 슈타지 요원 양성 학교에 명예 객원 교관으로 초빙되기도 했다.[18] 1986년과 1988년에는 회고록 『고백』을 발표했다.[3]

7. 2. 만년

독일 통일 이후, 기욤은 브란덴부르크 주 에거스란트 자택에서 조용히 살았다. 1995년 4월 10일 베를린 근교 페터스하겐/에게르스도르프에서 심장마비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1] 다른 자료에서는 신장암으로 베를린 병원에서 사망했다고도 한다.[1] 기욤의 첫 번째 부인 크리스텔은 2004년 3월 20일에 사망했다.[1]

8.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귄터 기욤 사건은 마이클 프레인의 연극 ''데모크라시''에서 다뤄졌다.

8. 1. 마이클 프레인의 연극 '데모크라시'

마이클 프레인의 연극 ''데모크라시''는 귄터 기욤 사건을 소재로 한다. 이 연극은 40년 만에 서독 최초의 좌파 성향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의 정치 경력과 그의 비서로 인한 몰락을 다룬다. 연극에서 기욤은 브란트를 감시하면서도 그를 존경하게 되는, 갈등을 겪는 인물로 묘사된다.

참조

[1] 뉴스 Guillaume: Wer war der Schurke? http://www.spiegel.d[...] 2016-06-21
[2] 서적 Strategic Intelligence in the Cold War and Beyond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4
[3] 문서 Die Aussage means The Statement, or My Stated View
[4] 뉴스 Gunter Guillaume, 68, Is Dead; Spy Caused Willy Brandt's Fall https://www.nytimes.[...] 2024-03-06
[5] 뉴스 Court reunion for German spy and his master: Former East Berlin agent meets his old boss Markus Wolf after 20 years https://www.independ[...] 2024-03-06
[6] 문서 "熊谷(2007年)"
[7] 문서 "熊谷(2007年)"
[8] 문서 "熊谷(2007年)"
[9] 문서 "熊谷(2007年)"
[10] 문서 この時に、ノラウ長官は、もう一人にも報告していた。それは[[ヘルベルト・ヴェーナー]]社会民主党議員団長で、このことは後に決定的な場面でヴェーナーは重要な役割を果たすことになった。
[11] 문서 "熊谷(2007年)"
[12] 문서 "グレゴーア(2015年)"
[13] 문서 グレゴーア・ショレゲン著『ヴィリー・ブラントの生涯』ではこう述べているが、別の資料では「1974年1月に連邦検察庁は証拠不十分で逮捕令状の申請を却下した」とされている。
[14] 문서 "熊谷(2007年)"
[15] 문서 "熊谷(2007年)"
[16] 문서 "熊谷(2007年)"
[17] 문서 "グレゴーア(2015年)"
[18] 문서 "熊谷(2007年)"
[19] 문서 Hermann Schreiber: Kanzlersturz – Warum Willy Brandt zurücktrat. Econ, München 2003
[20] 웹사이트 브란트 90세 생일기념 http://www.vorwaerts[...] 20070928032134
[21] 웹사이트 Der Fall Guillaume 슈피겔 1974년 41호 http://www.spiegel.d[...]
[22] 웹사이트 인터넷판 자서전 http://www.willy-bra[...] Bundeskanzler-Willy-Brandt-Stiftung 20120204143549
[23] 웹사이트 한스요헴 포겔 연설 http://www.bwbs.de/B[...] 20090901014759
[24] 서적 Willy Brandt. Die Biographie. Propyläen, Berlin 2001
[25] 웹사이트 사임서 http://www.dhm.de/le[...] 독일역사박물관 EB-Nr.: 1996/01/0045 20070627203021
[26] 문서 Protokoll über Vier-Augen-Gespräch mit dem DDR-Viezeaußenminister Kurt Nier am 23. Mai 1974 im DDR-Außenministerium in Ostberlin http://www.bundesarc[...] Bundeskanzleramt, VS-Registratur, Verhandlungen mit der DDR, Bd. 8
[27] 서적 Erinnerungen. UTB, Berlin/Frankfurt a. M.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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